<목회 일지> 오늘이라는 종말, 깨어 있음의 태도 우리는 종말을 종종 먼 미래의 장면으로 상상합니다. 전쟁과 재난, 붕괴와 공포 같은 이미지들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종말을 그렇게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종말은 날짜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모순적입니다. 한편에서는 전쟁과 폭력, 민주주의의 후퇴와 기후 위기가 겹겹이 쌓여가고, 다른 한편에서는 AI 혁명과 기술의 가속이 우리의 삶의 구조 자체를 바꾸고 있습니다. 위기와 가속이 동시에 존재하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묻게 됩니다. “이러다 세상이 끝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종말은 공포의 언어가 아니라 질문의 언어입니다. 종말은 “언제가 끝인가?”를 묻기보다 “지금, 너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묻습니다. 고대 철학자들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흘러가는 시간(크로노스) 속에 살지만, 우리의 삶을 바꾸는 것은 결단의 시간(카이로스)입니다. 카이로스는 거창하게 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조용히 묻습니다. “이대로 살아도 괜찮은가?” 예수님은 종말을 말씀하시고 나서 열 처녀, 달란트, 양과 염소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놀랍게도 거기에는 천재지변이나 정치적 격변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기다리는 태도, 맡겨진 것에 대한 책임, 그리고 작은 자를 향한 사랑이 등장합니다. 종말은 결국 오늘의 진실을 드러내는 자리입니다.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가가 아니라, 기다리는 동안 어떻게 살았는가를 묻습니다.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가 아니라, 맡겨진 것을 어떻게 사용했는가를 묻습니다. 얼마나 크게 고백했는가가 아니라, 누구를 사랑했는가를 묻습니다. “깨어 있음”이란 세상이 완벽하지 않음을 아는 태도입니다. 동시에 그 불완전함을 이유로 오늘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깨어 있는 사람은 “언제 끝나지?”를 묻기보다 “지금 나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를 묻습니다. 말 한마디,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작은 결단, 외면하지 않는 사랑 하나가 바로 종말을 사는 신앙의 고백이 됩니다. 종말론적 신앙은 산으로 들어가 세상을 등지는 삶이 아닙니다. 오히려 직업의 자리에서, 관계의 한복판에서, 소비의 순간과 SNS의 언어 선택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삶입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우리는 더 사랑할 수 있고, 더 정직할 수 있으며,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를 완벽하게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진실하게 살 책임은 있습니다. 종말을 아는 사람은 시간을 흘려보내지 않습니다. 그는 오늘을 가볍게 넘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늘”이야말로 우리의 믿음이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 |